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자겸의 난 (문단 편집) === [[왕당파]] 선공 === 중관(中官)[* [[환관]]의 다른 말.]이었던 김찬과 안보린은 대표적인 왕당파였는데 두 사람은 인종의 심기를 읽고[* 내가 외할아버지를 축출할 마음을 먹는다 하더라도 척준경이 저리 지키고 있으니 누가 나를 위해 나서 주겠는가 하고 한탄하는 말을 인종이 흘렸다고도 한다.] 이자겸과 척준경을 죽이고자 하였다. 이에 두 사람은 상장군(上將軍) [[오탁]]과 [[최탁]], 대장군(大將軍) 권수, 장군 고석과 연합해 계획을 짠다. 장군 직위를 가진 자들은 원래 척준경의 상관이었다가 척준경이 권력을 잡음에 따라 부하가 되버린 자들로 척준경을 싫어했다. 인종 4년(1126년) 2월 왕당파가 움직였는데 [[지녹연]] 등은 저녁 시간에 [[만월대|본궐]]로 들어가 당시 궐에 있던 척순, [[척준신]], 전기상, 최영, 김정분을 죽였으며 그들의 시체는 본궐 궁성 밖으로 던져졌고 본궐은 폐쇄됐다. 이자겸파였던 신하 학문은 몰래 궁성을 넘어 다른 이자겸파 신하 지호에게 알렸고 지호는 곧장 이자겸에게 변란이 생겼음을 알렸는데 이자겸은 왕당파가 먼저 싸움을 걸거라고 생각치도 못한 듯 하다. <고려사>에 따르면 이자겸은 당황해 장남 [[이지미]], 척준경, 자신의 당파 소속 신하들을 의친궁으로 불러 어떻게 할지를 의논했다. 급박하게 정세가 변하니 아무도 뾰족한 수를 못내고 있던 중 이자겸의 사돈이자 척준경의 인척인 [[왕의(고려)|왕의]]가 몰래 본궐을 빠져 나와 상세한 설명을 한다. 자신의 유일한 아들과 친동생이 살해당했다는 걸 들은 당대 최강의 무력을 지닌 척준경은 대노하였다. >"'''일이 급하다. 앉아서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다.'''" >---- >척준경, 급보를 듣고. 고려사 이자겸 열전. 척준경은 윤한, 최식, 이후진 등 부하와 장졸 수십 명을 이끌고 가 바로 황성(皇城)의 남문이자 정문인 주작문[* 궁성을 둘러싼 황성의 남문.]에 도착했다. 하지만 봉쇄된 주작문을 열지 못하자 윤한을 시켜 성을 타고 넘어가 문을 강제로 열었고 궁성(宮城)의 2번째 문이었던 신봉문[* 궁성 남문이자 정문인 승평문 뒤에 있다.]에 도착해 땅이 흔들릴 정도로 분노에 찬 고함을 질렀다.[* <고려사> 원문에는 "呼譟聲殷地(호조성은지)", 부르며 떠드는 소리가 땅을 뒤흔들었다고 나와 있다.] 왕당파는 척준경의 고함소리를 듣자 그가 대군을 끌고 왔다고 착각해 겁이나 신봉문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이자겸은 따로 움직여 왕당파의 집을 부수고 불태운 뒤에 처자식을 붙잡아 가두었으며 그렇게 하룻밤이 지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